아들은 찢어지게 가난한 산골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들이 네 살 때 아버지는 모진 가난을 어머니에게 물려주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습니다. 아들은 홀어머니 밑에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이른 아침,
시계 바늘처럼 정확한 어머니의 칼도마 소리가 들리면 아들은 잠에서 깨어 공부에 몰두했습니다.
산골의 낮은 짧고 밤은 길었습니다. 저녁 해가 붉은 노을을 토해낼 즈음 산골은 어둠에 휩싸였습니다. 칠흑 같은 밤이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산골의 밤은 별빛만 총총히 빛날 뿐이었습니다. 아들이 학교에 간 사이에 어머니는 행상을 나갔습니다.
밤이면 침침한 호롱불을 사이에 두고 아들은 공부를 하고 어머니는 실밥 보푸라기와 실랑이를 벌이며 삯바느질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다가 아침에 일어나 보면 호롱불의 그을음 때문에 코밑이 새까매진 모습을 서로 쳐다보고 웃곤 했습니다. 아들의 소원은 밝은 전깃불 아래에서 공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면 촛불 아래에서라도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그마저도 아니면 호롱불 심지라도 최대한 올려놓고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호롱불 심지마저 올리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머니는 바느질을 하면서 호롱불을 아들쪽으로 밀어주었지만 그것은 반딧불과 같은 가물거리는 답답한 불꽃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이 호롱불을 아들이 조금이라도 키울라치면 어머니는 눈을 부릅뜨면서 말렸습니다. 행상을 다녀오면서 소주병에 사오는 등유를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버지의 제삿날이었습니다. 아들은 제사상 위에 환하게 밝혀져 있는 촛불을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제사가 끝나자 어머니는 몽당초들을 종이에 싸서 서랍에 넣어둡니다. 아들은 촛불 아래에서는 더욱 공부가 잘 될 것 같습니다.
다음 날, 어머니가 행상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 때 아들은 서랍에서 초를 꺼내어 불을 댕겼습니다. 환하게 타오르는 촛불은 눈을 시원하게 해주었고 책을 펼치자 머리에도 쏙쏙 들어옵니다.
추운 겨울날 저녁, 어머니가 행상에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는 소리를 지르며 맨손가락으로 뜨거운 촛불을 꺼버렸습니다.
"다음 제사에 쓰려고 두었던 양초를 켜다니..." 어머니에게서 큰 소리를 들은 것이 그때가 처음입니다. 그리고 점점 잦아드는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했지만 아들은 어머니의 눈물을 볼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촛불을 꺼버려 캄캄했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어둠 때문에 어머니의 눈물을 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몇 년 뒤 아들이 중학생이 되었을 때, 이 산골마을에도 전깃불이 들어왔습니다. 반짝반짝 환하게 켜진 전깃불은 환상적이었습니다.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가난이라는 한계를 실감하고 대학진학 문제를 고민했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을 조용히 불렀습니다.
"가난에 굴복해서는 안 돼, 공부라는 건 다 때가 있는 거야, 돈으로 물려준 재산은 도둑맞아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머릿속 재산은 남이 도둑질할 수도 없어, 등록금은 걱정 말고 대학에 가도록 해라."
어머니의 이 말은 아들에게 있어 평생을 담금질하는 채찍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촛불 켜는 것마저 아껴가면서 아들의 대학등록금 준비를 했던 것입니다. 아들은 대학 교수가 되어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빈방의 불을 끄고 손자들이 끄지 않은 컴퓨터까지 끄고 다닙니다. "촛불 하나 못 켜게 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환한 곳에 있기가 미안하다"고 하면서...아들은 호롱불마저 공부하는 아들 쪽으로 밀어놓고 어둠 속에서 바느질을 하셨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말했습니다. "어머니, 너무 환한 것보다는 어두운 듯해야 연구가 더 잘 되는 것 같아요."
어머니께서 호롱불마저도 아들에게 양보한 그 마음이 커다란 힘이 되어 아들의 가슴에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윤문원 "식구생각"-
'말씀과 지혜 > 좋은 글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치킨게임과 생존게임 (0) | 2009.03.24 |
---|---|
김수환 추기경, 삶, 사랑, 한국 사회 (0) | 2009.03.12 |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성공한다 (0) | 2009.02.18 |
몹시 울고 싶은 날이면 영화관에 간다 (0) | 2009.02.10 |
웃음의 신비와 효과 - 웃음이 있는 자에겐 가난이 없다 (0) | 2009.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