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는 신문주간이고 지난 7일은 신문의 날이었다. 1886년 창간한 <독립신문>의 발행일을 기준으로 삼았다고 한다. 독립이라는 제호는 당시 정세를 고려하면 나라의 독립을 뜻하는 것이겠지만 언론의 사명과 관련해서도 말뜻을 곱씹어볼 만하다. 독립, 곧 ‘홀로-서기’야말로 신문을 신문답게 만드는 핵심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신문의 위치는, 아니 기자의 자리는 사이(間)다. 너와 나 사이, 정부와 국민 사이, 기업과 소비자 사이가 제자리다. 서로 다른 자들 사이에서 서로를 통하게 하여 ‘우리’로 만들어주는 매개자가 기자다.
사이란 또 바깥을 뜻한다. 나의 바깥이요 너의 외부가 사이다. 기자는 외부자인 것이다. 외부자에게 쉽게 속내를 드러내는 내부자는 없다. 그런 점에서 기자의 업무환경은 몹시 거칠다. 우리가 자주 소통이라는 말을 되뇌지만, 서로 다른 너와 나를 뚫고 흐르게 한다는 소통이 쉬울 턱이 없으리라. 하긴 소(疏)라는 한자 속에 ‘거칠다, 친하지 않다’는 뜻이 담긴 데도 이런 생각이 들어 있는 듯하다. 곧 기자는 거칠다는 뜻인 ‘소’의 자리에 서서 서로를 ‘통’하게 만드는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위치한다.
어쩌면 기자는 역설적 존재다. 낯선 두 존재를 이어서 ‘함께, 더불어’ 하도록 중개하면서도 또 스스로는 그 ‘함께’의 안으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영원한 외부자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기자는 한통속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일 기자가 ‘사이의 긴장’을 잃거나 외부자로서의 위치를 잃어버리면 이미 기자가 아니다.
우리는 <논어>와 <맹자>가 증오의 책이라는 점을 종종 잊는다. 아껴야 할 자는 뜨겁게 사랑하지만 미워할 자에 대해선 처절하게 증오하는 것이 유교식 사랑법이다. 이에 맹자는 사랑을 뜻하는 인(仁)에다 사회정의를 뜻하는 의(義)를 꼭 함께 거론한다. 그는 전국시대 대혼란의 원인을 지식인들이 제 짓을 올바로 하지 않는 데서 찾았다. 국가와 인민 사이에서 둘을 소통시키는 매개자의 구실을 포기하고 도리어 이 나라 저 나라 권력자들을 찾아다니며 제 지식을 뽐내며 팔아먹는 짓이야말로 살육의 시대를 지속시키는 큰 원인이라 여겼다.
그는 공동묘지를 기웃거리며 상갓집의 찌꺼기 밥과 술을 얻어먹고는 집에 돌아와서 큰 잔치에 초대받았던 양 으스대는 꼴이 지식인 모습이라고 직격탄을 날린다. 이렇게도 묘사한다. 한 그릇의 밥을 먹으면 살고 못 먹으면 죽는 절박한 순간에도 발로 툭 차며 주는 밥은 거지조차도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수억원씩 턱턱 안기면 힘 있는 자의 개가 되고 마는 까닭은 본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요컨대 빌어먹을지언정 붙어먹지는 말아야 하는 것이 지식인의 본성이라는 것.
오늘날 기자의 본성은 무엇인가. 독립하여 외부자로 사는 것이다. 내부자가 되거나, 안으로 들어와 비바람을 피하거나, 힘 가진 자에게 붙어먹으면 이미 기자가 아니다. 오늘 언론환경, 특히 신문사들이 어렵다고 한다. 하면, 되돌아볼 일이다. 과연 이 시대 기자들은 금력(기업)과 소비자 사이, 권력(국가)과 인민 사이에 서서 스스로를 소외시키면서 도리어 둘을 소통시키는 역설적 삶을 살아왔는지를. 내친김에 맹자가 오늘 기자들에게 할 법한 조언을 청해보자.
‘선비가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을 말하면 이건 말로써 낚시질하는 꼴이요, 말해야만 하는데도 말하지 않는 것은 침묵으로 무엇을 낚으려는 짓이다. 이들은 다 좀도둑질과 진배없는 것이다.’(士未可以言而言, 是以言之也. 可以言而不言, 是以不言之也. 是皆穿踰之類也.)
2009.4.10 한겨레신문 [세상읽기] 빌어먹기와 붙어먹기 /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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